중앙은행 오디세이 <34> 북한에 넘어간 은행권과 인쇄 원판

구분
화폐·금융
등록일
2016.10.12
조회수
9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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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기획팀(02-75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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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해방 이후 남한에서 발행된 100원권(위). 일본이 남긴 원판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은행’과 ‘대일본제국인쇄국제조’라는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래는 1950년 7월 22일 대구에서 최초로 유통된 한국은행권.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협조로 일본 대장성 인쇄청 타키노가와 공장에서 제조됐다. [사진 한국은행]]



1990년 개봉된 영화 ‘남부군’은 안성기·최민수·최진실 등이 출연해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당대의 블록버스터였다. 이 영화는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지식인 이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빨치산들은 남한의 토벌부대에 쫓겨 산속을 헤매면서도 배낭에는 조선은행권을 담아 다녔다. 잠깐 쉬는 동안에는 물과 땀에 절어 엉겨 붙은 돈을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펴서 널어 말렸다. 4명밖에 안 되는 낙오병들은 산속에서는 쓸 수도 없는 그 돈을 서로 훔치기까지 했다. 사유재산이 없는 공산사회를 꿈꾸던 그들이 화폐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돈은 어디서 구한 것일까?
 

해방 직후 남북한은 화폐문제에 관해 접근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은 북조선중앙은행을 세운 뒤 47년 12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 교환비율과 한도를 달리해 일제강점기 때 쓰던 돈을 인민권(북한 화폐)으로 교환했다. 극심한 저항과 재산권의 변동이 뒤따르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사진2  :

1951년 7월 정부에 보고된 한국은행 지하금고 피탈 경위서. 은과 미발행 조선은행권을 ‘빼앗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은 운반 능력이 없어 ‘포기한 것’이었다. [사진 한국은행]]



[일제강점기 때 쓰던 지폐 1950년까지 사용]이에 비해 남한은 현상유지책으로 버텼다. 북한의 화폐개혁 직후 미 군정청도 화폐개혁을 검토했지만, 사회 혼란이 걱정돼 차일피일 미뤘다. 46년 초 공산당원들이 100원권 위조지폐를 만들어 온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구 화폐를 고집했다(조선정판사 사건, 2014년 10월 12일 제2화 참조). 이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도 화폐개혁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신설되는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의 이름이 적힌 화폐를 발행하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렸다(최초의 한국은행법 제117조). 이미 인쇄해 둔 조선은행권이 아깝다는 이유에서 내린 그 결정은 무신경과 무사안일의 극치였다.


북한은 2년 전 회수한 조선은행권을 남한에서 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조선은행권을 제조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임직원들이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쇄기와 인쇄원판들을 내팽개치고 피난 갔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5전부터 1000원까지 6종의 지폐 중 제일 많이 쓰는 100원권 인쇄원판을 골라 돈을 찍기 시작했다(1910년부터 59년까지 우리나라에는 동전이 없었다). 이것이 화폐대란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그런데 6월 28일 한국은행 본점을 접수한 북한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하금고에 가보니 금괴 260㎏과 은괴 16t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서 105억원에 이르는 미발행은행권이 고스란히 있었다. 처음에는 웃었지만 은괴 16t과 지폐 1억장을 나르려니 북한군 병사들의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국군에 쫓기는 빨치산 이태의 배낭에 있던 지폐가 바로 그 돈이었다. 이것이 화폐대란의 두 번째 원인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인해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아무 준비도 없이 피난 갔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27일 새벽 측근들만 데리고 목포까지 피했다가 너무 심했다는 판단에 따라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 충남지사 관저에 머물렀다. 그날 밤 10시 김유택 재무차관이 궂은 비를 맞으며 서울에서 내려오자 그를 불러 금괴와 은행권, 그리고 홍삼의 행방을 추궁했다. 김 차관이 “금괴는 반출했지만, 은행권과 홍삼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두고 왔다”고 하자 노발대발했다. 방귀 뀌고 큰 소리 치는 격이었다.


[인천상륙 맞춰 조선은행권 퇴출 결정]다음날 대통령은 ‘금융기관 예금지급에 관한 특별조치령(긴급명령 제2호)’을 발표했다. 한 세대 당 1주일에 3만원, 한 달에 7만원으로 예금인출액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은행도 비상대책을 세웠다. 한국은행의 6개 지점을 통틀어 미발행은행권은 40억 원에 불과했고, 그것이 고갈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29일 구용서 한은총재는 도쿄지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본 대장성 인쇄청을 통해 1000원권과 100원권을 새로 제작할 것을 지시했다. 만일 보름 안에 그 일을 끝내지 못하면, 대전 시내 은행들의 자기앞수표 용지를 회수해 그 위에 한국은행 총재의 도장을 찍고 임시화폐로 써야 한다고 다급함을 알렸다.
 

지시를 받은 김진형 도쿄주재 부총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를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1초가 아까운 지경”이라는 말을 들은 최고사령부는 일본 관료들을 압박했다. 노동자들이 툭하면 파업을 해서 최고사령부가 골치를 썩일 때였다. 7월 1일 대장성 인쇄청의 이지치 타츠오(伊地知辰夫) 장관은 “이럴 때 연합군에 최대한 협조하는 것이 일본이 살 길”이라는 비장한 훈시와 함께 무기한 철야근무를 명령했다. 지시를 받은 기술자들은 일요일인 2일 하루 만에 도안을 완성했다. 도안을 본 김진형은 대통령과 광화문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며 집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그것을 토대로 도안이 수정되자 살인적인 강행군이 뒤따랐다. 미군이 작업자들에게 총을 겨누며 쉬지도 못하게 보채는 바람에 보통 6개월 걸리는 작업이 열흘 만에 끝났다.
 

7월 13일 김해공항에 새 돈이 도착했다. 해방 직후 군정청 시절 조선식산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해리 로빈슨 해군 소령이 공수했다. 7월 20일 새로운 은행권 발행이 공고되고, 22일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새 돈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21일 미 공군이 서울 원효로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폭격했지만, 북한은 여전히 엄청난 양의 100원권을 갖고 있었다. 그 돈이 워커라인(포항-영천-창년-마산-통영에 이르는 저지선) 안쪽으로 넘어와 남한의 화폐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전쟁도 승산이 없다.
 

8월 28일 대통령은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긴급명령 제10호)’을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100원권 조선은행권을 강제 퇴출시켰다(다른 종류의 지폐들까지 퇴출시킬 여력은 없었다). 처음에는 워커라인 이남과 제주도에서만 실시되다가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점차 확대했다. 서울-경기-강원(10월)과 충청-전라-경상(11월) 지역에 이어 빨치산 출몰지역(1951년 4월)까지 확대되면서 남부군 이태가 경남 함양의 어느 산자락을 헤맬 때 그의 배낭에 있던 100원짜리 조선은행권은 시나브로 쓸 수 없는 휴지조각이 되어갔다.




[사진3  :

1950년 7월 5일 대전에서 급히 작성된 최초의 한국은행권 제조 지시서. 한국은행 도쿄지점으로 보내는 이 문서에서 재무장관과 한은 총재는 1000원권 6000만장과 100원권 3억장을 주문하면서 ‘원(圓)’을 ‘WHAN’으로 표기했다. [사진 한국은행]]



[김진형 부총재가 ‘WON’ 표기 결정]전쟁 초기에 미발행은행권과 화폐 인쇄원판을 고스란히 두고 피난한 것은 대통령이 화내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한국은행은 전쟁 초기의 골든타임에 화폐의 운반과 공급, 교환에 너무 많은 시간과 인력을 빼앗겼다. 공비들의 총탄을 뚫고 조선은행권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도 생겼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가였다.


그 일을 교훈삼아 6개월 뒤 1·4후퇴 때는 준비가 철저했다. 한국은행은 국군의 퇴각이 결정되자 미발행은행권을 소각했다. 그리고 답십리에 있던 재무부 전매국의 담배갑 인쇄기를 부산으로 반출했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인쇄기였다. 이번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기술자들도 함께 후퇴했다. 그들은 부산 동래구 명륜동의 어느 공장에서 1951년 3월 1일부터 돈을 찍기 시작했다. 8명의 서적 인쇄공들이 7명의 한국은행 직원 지시에 따라 개인 소유 크레용 공장에서 재무부의 담배갑 인쇄기로 돈을 찍는, 황당하고 한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1951년 8월 13일 ‘한국조폐공사법’이 제정되고 10월 1일 150만원의 정부 자본금으로 조폐공사가 출범했다.
 

조폐공사와 한국은행권은 전쟁 중에 탄생했다. 돈에 적힌 ‘WON’도 마찬가지다. 1888년 최초의 서양식 금화를 제작할 때 고종의 명을 받았던 윤치호는 ‘WARN’이라고 썼다. 일본이 이를 ‘WHAN’(1893년)이라고 고치고, 러시아는 다시 ‘WON’(1901년)으로 바꿨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은행권의 ‘원(圓)’은 ‘YEN’으로 표기됐다. 1950년 7월 5일 재무장관과 한국은행 총재가 김진형에게 보내는 지시서에는 ‘WHAN’이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김진형이 현지에서 ‘WON’으로 고쳤다. 근거는 없었다. 전쟁 중에 김진형 혼자서 결정한 ‘WON’은 2012년 한국은행법 개정을 통해서 비로소 법적 근거를 갖췄다.
 

돌이켜 보건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쟁 초기에 실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순발력은 좋았다. 무사안일과 무신경 속에서 해방이 되고 5년이 넘도록 조선은행권을 계속 썼으나 막상 급해지니까 전광석화처럼 회수했다. 지리산 빨치산을 뺨치는 민첩함이었다. 전쟁 중의 경제정책은 임기응변 그 자체였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6.10. 9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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