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
1947년 미국 연방인쇄국이 제조한 한국은행권(위).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가 전달한 구 한국은행권(아래)을 참고했기 때문에 ‘환’이 ‘원’으로 적혀 있다. 오른쪽 거북선 그림은 조선은행 옆 소공동의 충무공기념회(회장 조병옥)에서 최순주가 입수한 출처미상의 그림을 토대로 했다. ]
화폐는 경제시스템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화폐개혁이나 화폐단위의 변경(redenomination)은 상징적인 변화다. 그런데 그 상징적 변화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 논란은 명예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까지 영국은 유난히 함량 미달의 불량주화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다. 명예혁명 직후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철학자 존 로크는 당시 극심했던 그레샴의 법칙에 경악하면서 화폐개혁을 제안했다. 화폐에 대한 신뢰 회복이 혁명정부의 성공과 직결된다는 그의 제안에 따라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책임자로 임명되고 1696년 새 돈이 발행됐다.
[전쟁 통에 화폐 잔액 10배로 늘며 가마니로 돈 나르는 상황 펼쳐져 53년 설 연휴에 100대 1 개혁 발표 정치권 반발로 예금 동결은 실패]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로크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경제학자 니콜라스 바번은 “어떤 금속이 화폐로 쓰이게 되는 이유는, 그것의 물리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힘 때문”이라며 화폐개혁을 반대했다. 그가 보기에는 힘없는 정부의 섣부른 화폐개혁은 불안감을 가중시켜 거래위축과 물가불안만 조장할 뿐이다.
화폐개혁의 효과를 두고 영국에서 벌였던 논쟁은, 일본이 패망한 후 서울과 워싱턴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1946년 2월 일본에서는 화폐개혁이 실시되었고, 5월 서울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조선은행권을 위조해서 남발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이를 계기로 서울의 미 군정청과 경제협력처(ECA)는 화폐개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47년 봄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가 미 군정청의 주선으로 미국 연방인쇄국을 방문했다. 몇 달 뒤 ‘미제 은행권’들이 극비리에 조선은행 금고에 도착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백악관·재무부·국무부가 마지막 순간 제동을 걸었다. 돈만 바꾼다고 한국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체력만 소모할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남한에서는 조선은행권이 계속 유통됐다. 미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에 입양된 미제 은행권은 인쇄비 50만 달러만 날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47년 인쇄한 돈 한국전쟁 겪으면서도 무사]
[사진2 :
전쟁이 끝난 뒤의 한국은행 조사부 라인. 신병현 부장(왼쪽 둘째), 송인상 부총재(넷째), 김정렴 기획조사과장(오른쪽 끝) 등이 보인다. ]
3년 뒤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은행 수뇌부가 급하게 피난을 떠나면서 그 돈은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한국은행 지하금고를 둘러보던 북한군은 40평짜리 방 한 칸을 가득 채운 정체불명의 돈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 돈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돈으로 쓸 수 없는, 한낱 인쇄물에 불과했다. 결국 포장도 뜯어지지 않은 채 서울수복 이후 고스란히 한국은행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보내져 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의 물품창고 안에서 다시 잠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바깥에서는 돈이 홍수를 이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날 558억 원을 기록했던 화폐발행액은 1951년 말 6000억 원을 돌파했다. 바야흐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쌀가마니에 돈을 담아 리어카로 싣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백두진 재무장관은 태평양사령부 경제과학국장 마콰트의 말이 떠올랐다. 1946년 12월 부산에 온 마콰트는 자신이 지휘했던 일본의 화폐개혁 즉, 인플레이션 퇴치를 위해서 통화량을 4분의 1로 축소했던 조치를 한국에도 권고했다.
백두진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김유택 재무차관이었다. 1951년 말 대통령이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를 경질하려고 하자, 조선은행 때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김유택을 후임자로 천거했다. 대통령은 김유택(당시 40세)이 너무 젊어서 주저했지만, 마침 부산을 방문한 블룸필드 박사(한국은행법 초안 작성자, 뉴욕 연준 직원)로부터 적임자라는 평을 듣고 임명을 단행했다. 두 달 뒤에는 백두진의 추천으로 송인상(훗날 재무장관) 재무부 이재국장이 한국은행 부총재(현재 부총재보)로 임명됐다. 그는 백두진의 특명을 받고 이미 화폐개혁에 관한 외국의 사례와 자료를 수집해 놓고 있었다.
백두진이 마지막으로 점찍은 사람은, 공교롭게도 자기 때문에 물을 먹은 한국은행의 김정렴(훗날 재무장관) 조사부 기획조사과장이었다. 그는 1946년 초 ‘우리나라 발권제도를 논함’이라는 논문(최초의 행내 현상논문)으로 1등상을 받은, 그 분야 최고의 이론가였다. 하지만 도쿄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은행법과 독립성을 내세우며 재무부 특별감사단과 마찰을 빚어 부임 1년 만에 본점으로 소환됐다. 그 특별감사를 지시했던 백두진은 김정렴의 문책성 귀국이 은근히 반가웠다.
[김유택·송인상·김정렴, 여관방 전전하며 추진]
김정렴이 귀국한 1952년 초에는 친위 쿠데타에 가까운 ‘부산 정치파동’ 때문에 세상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백두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유택·송인상·김정렴에게 서약서를 받고 화폐개혁을 준비시켰다. 그 세 사람 중에서도 김정렴의 역할이 컸다. 방대한 법률 검토와 구체적 추진방안, 일정, 수송 계획, 비상대책 마련이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태연하게 업무를 보고, 밤에는 여관방을 전전하며 장관의 특명을 준비하는 이중생활이 열 달 가까이 계속됐다. 그의 연기가 얼마나 완벽했던지, 동료·상사·부하는 물론 가족들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백두진은 1953년 2월 초 서울로 올라가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았다(당시 정부는 부산에 있었지만, 대통령은 서울에 머물렀다). 국무총리 서리, 재무장관, 기획처장관을 겸하고 있던 백두진은 2월 14일 경남도청 임시회의실(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내)로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내일 화폐개혁을 합니다”라고 충격을 던졌다. 설 연휴가 시작되어 그나마 혼란을 줄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일요일인 2월 15일 아침 대통령 긴급명령 제13호를 통해 이른바 ‘제1차 화폐개혁’이 발표됐다. 그 요지는 ‘100원(圓)=1환()’의 비율로 화폐단위를 변경하고 500환(구 5만원)을 넘는 자금은 일단 은행예금으로 동결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한국은행에서는 긴급 금융통화위원회가 소집되어 그때까지 유통되고 있던 조선은행권의 퇴출을 의결했다.
설 연휴가 끝나자 국회에서는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법률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미 동결된 예금을 어떻게 푸느냐가 핵심이었다. 당초 화폐개혁을 기획한 사람들은, 1000환(구 10만원)을 초과하는 예금의 25%는 장기 예금으로 묶어서 산업부흥에 동원하는 것을 구상했다. 그러나 현찰이 많은 부자들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국회의원들도 제동을 걸었다. 화폐개혁이 너무 성공적이면, 백두진이 소속된 이북출신 이범석 파(족청계)가 힘을 얻을 것을 계산한 것이다. 결국 사흘간의 긴 토론 끝에 제정된 ‘긴급금융조치법(2월 21일)’에서 예금동결 부분은 유명무실해졌다.
[미국, 한국 정부의 물가안정 의지 인정]
[사진 3 :
1947년 2월 새 돈 인쇄를 협의하기 위한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의 해외출장을 준비하는 문서. 워싱턴의 전쟁부와 서울의 미 군정청이 그의 교통비·숙박비·식사비까지 신경썼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만든 지폐가 53년 화폐개혁의 바탕이 됐다. [사진 신병현씨 장녀 신수경,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
화폐개혁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백두진과 한국은행 삼총사는 그들의 내자동원(內資動員) 계획이 당리당략 때문에 일주일 만에 퇴색하는 것에 몹시 실망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물가안정을 향한 한국인들의 실천의지에 감동을 받고, 예금동결 무산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마이어협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루고 있었던 유엔군의 한국은행 차입금 8580만 달러를 화폐개혁 직후 한 번에 흔쾌히 갚았다.
결과적으로 제1차 화폐개혁은 화폐 단위만 변경한 셈이다. 그러니 경제적 성과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밀유지만은 대성공이었다. 그 비결의 하나는 화폐개혁을 하면서도 화폐를 인쇄하지 않은 데 있다. 조선은행 출신인 백두진은 국제 입양아에서, 숨겨 놓은 혼외자식에서, 전쟁 미아(迷兒)에서, 돌아온 탕아(蕩兒)의 운명을 거듭했던 ‘1947년산 미제 은행권’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제1차 화폐개혁은 그 애물단지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 출발선이었다.
미국 연방인쇄국이 그 돈을 만들 때는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지 않았다. 한국은행도 없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시절의 구 한국은행권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구 한국은행권에는 ‘환()’과 ‘원’이 공존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을 ‘원’으로 읽었기 때문이다(오늘날에도 서울 조선호텔 옆 ‘丘壇’을 ‘원구단’이라고 부른다). 그 돈을 참고한 미제 은행권에서도 ‘’이 ‘원’으로 적혀 있어 사람들은 상당 기간 혼란스러워했다.
화폐는 경제시스템의 상징이다. 그런데도 한국전쟁 때까지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미국이 방치한 것은 한국을 앞날이 불투명한 존재로 본 결과다. 일본과 달리 한국 스스로 추진한 조선은행권 퇴출과 통화량 축소 노력은, 존재의 불안감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사건이었다. 그것이 제1차 화폐개혁의 존재론적 의미다. 그 무렵 전쟁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2.26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