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⑭ 식민지 조선의 통화제도 - 껍데기만 남은 조선은 금본위제의 변방이자 이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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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금융
등록일
2015.08.1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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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기획팀(02-75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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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남단 다롄(大連)시의 기차역 부근. 다롄은 일본이 운영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본사가 있던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일본은 1918년 조선은행을 이 지역의 중앙은행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1928년 장쭤린(張作霖) 폭사사건 이후 이곳을 둘러싼 중일 간 군사대립이 격화하면서 조선은행의 만주 영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달 금융실명제 원칙이 깨졌다. 핀테크(Fin-tech) 활성화를 위하여 금융기관 창구를 찾지 않고도 계좌를 틀 수 있도록 하는 ‘비대면(非對面) 실명확인’이 허용된 것이다. 어떻게든 금융산업 침체를 극복해야겠다는 금융당국의 절박한 위기의식이 20년간 유지되어 온 금과옥조(金科玉條)를 후퇴시켰다.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기존 원칙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칙을 더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논쟁이 생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정확대나 양적 완화를 둘러싼 국제적 논란이 좋은 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금본위제도 복귀 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925년 영국은 금본위제도로 복귀하면서 ‘순금 7.988그램 = 1파운드’로 규정했다. 그러나 반드시 순금 7.988그램이 있어야만 1파운드가 공급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란은행은 준비금(gold reserve)이 없더라도 국채를 담보로 1400만 파운드까지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영란은행법 제9조, 1844년).

이런 예외를 ‘보증발행(fiduciary issue)’이라고 하는데, 이는 준비금에 기초하는 정화발행(正貨發行)의 보충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채의 수요기반을 넓히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금본위제도를 취하는 다른 나라들도 이를 모방했고, 여기서 ‘국채 중심 공개시장조작’의 전통이 생겼다.

[사진2 :베를린에 본점을 두었던 라이히스방크. 이 은행의 굴신제한제도는 일본과 조선의 화폐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은행은 히틀러에게 이용당한 탓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해체되었으며, 건물은 현재 독일 외교부 청사로 쓰이고 있다.]
 

조선은행, “만주가 우리의 생명”
처음에 1400만 파운드로 정해진 보증발행 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2억6000만 파운드로 늘어났다(통화 및 은행권법, 1928년). 상당량의 금이 미국으로 유출되어 과거처럼 금본위제도를 운영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미국도 남북전쟁 때는 금이 턱없이 부족하여 보증발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독일은 미국보다 한 발 더 나갔다. 중앙은행이 매년 초과발행액의 5%를 세금(발행세)으로 내기만 하면, 보증발행 한도를 얼마든지 초과(제한 외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라이히스방크법, 1875년) 나중에 이 제도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뇌관이 되었지만, 독일처럼 금이 부족했던 일본은 이 제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일본은행 조례(1882년)’와 ‘조선은행법(1911년)’에 그대로 담았다.

조선에는 ‘1엔(円) = 1원(圓)’의 등가 원칙이 통했다(조선은행법 제21조). 화폐제도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인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금 이외에 일본은행권, 일본은행 예금과 은괴까지 조선은행의 준비자산으로 인정되었다(조선은행법 제22조). 따라서 다분히 복본위제도의 요소가 있었다(다만 은괴는 준비자산 총액의 4분의 1을 넘지 않도록 했다).

금 생산량만 보자면, 조선도 일본처럼 금본위제도를 실시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1920년대까지 일본 대장성 조폐국이 매년 조선에서 가져간 금의 양은 일본에서 수집한 금의 양과 비슷했다. 조선은행은 국내에서 생산된 금을 매입하여 오사카의 조폐국으로 보내고, 그 금액만큼을 일본은행권 또는 예금으로 받았다.

준비금, 일본은행권, 일본은행 예금은 조선의 수출입 동향과 연동하여 움직이므로 조선은행이 늘리기가 힘들었다(식민지 조선은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렸다). 그래서 조선은행은 만주를 활용했다. 만주 상인들에게 조선은행권으로 대출해 주고 중국돈(은화)으로 상환받거나, 만주에서 콩(大豆)을 수입하는 일본 상인들에게 조선은행권으로 대출해 주고 도쿄에서 일본은행권으로 회수하면 준비자산이 저절로 확보된다. 이것이 조선은행이 만주 영업에 그토록 목을 맨 이유였다.

조선은행의 정화발행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에는 겨우 40%대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만큼 보증발행이 많았다. 1909년 설립될 때 보증발행 한도는 2000만 원이었으나, 이후 3000만 원(1911년), 5000만 원(1918년), 1억 원(1937년), 1억 6000만 원(1939년)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영란은행과 달리 국채뿐만 아니라 상업어음까지도 보증발행의 담보로 인정되었다. 그러니 조선은행의 영업확장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만큼 쉬웠다.

조선은행은 보증발행 한도를 자주 어겼다. 특히 정부의 지시로 중국에 대한 자금지원 즉, 니시하라 차관(西原借款) 제공에 얽혀든 이후에는 한도를 지키는 때가 별로 없었다. 그때마다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제한 외 발행’ 한도를 승인받고 5%의 발행세를 납부했다.

[사진3:오랜 논란 끝에 1844년 금본위제도를 채택하면서 영란은행에 발권독점권을 부여한 로버트 필 수상. 영란은행의 ‘보증발행’ 제도는 그의 협상술에서 나온 결과다. 오늘날의 보수당을 만든 그는 곡물법 폐지와 근대 경찰제도 도입 등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영국 경찰을 ‘보비(Bobbies)’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의 애칭이다.]

일본 군부와 결탁한 조선은행
조선총독부는 제한 외 발행에 대해 관대했다.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영업확장을 바라는 조선은행 임직원들은 “만주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는 일본 육군이 내각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력히 주장했던 ‘만주생명선론’ 즉, 만주가 일본의 미래이기 때문에 일전(一戰)을 무릅쓰고 진출해야 한다는 침략논리와 똑같았다. 군부가 지배하는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의 제한 외 발행 요청을 언제나 흔쾌히 받아들였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두 기관의 밀착을 의심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제국의회에 조선은행법 제정안을 제출했을 때 카스야(粕谷義三)와 니시무라(西村丹太郞) 등 상당수 여야 의원들이 비판적이었다. 특히 보증발행 한도를 늘리는 데 대해서는 “대한제국 시절 정해진 보증발행 한도에도 30%의 여유가 있으며, 보증발행을 통해 조선은행권이 늘어나면 ‘1엔(円) = 1원(圓)’의 등가원칙으로 인하여 일본의 금본위제도까지 무너진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아라이(荒井賢太郞) 조선총독부 탁지부장관이 정부 측 대표로 나와서 “장차 조선 경제의 확장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얼버무렸지만 설득력은 약했다.

한일강제병합 직후 추진된 조선은행법 제정 당시 핵심 이슈는 따로 있었다. 바로 “식민지 통치의 힘이 내각(대장성)에서 나오느냐, 군부(조선총독부)에서 나오느냐”하는 문제였다. 국론분열의 폭발력이 잠재된 이 문제는 적당히 덮어졌다. 조선은행의 보증발행 한도는 일단 증액하되 추가 증액할 때마다 제국의회가 통제하고, 이 은행의 감독권은 대장성과 조선총독부가 분할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타협을 통해 늘어난 보증발행 한도의 상당 부분은 중국과 만주 영업에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1918년 조선은행의 임원 증원(부총재 신설, 이사 1인), 영업범위 확대(신탁업무 추가)와 함께 보증발행 한도를 다시 늘릴 때는 의원들의 반발이 더욱 컸다. 조선의 사정에 밝았던 마키야마(牧山耕藏) 중의원은 “조선은행은 그 경영으로 볼 때 ‘대륙은행’이나 ‘동아은행’이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비꼬았다. 7년 전 보증발행 한도 확대에 앞장섰던 아라이도 이번에는 반대했다. 귀족원 의원이 되어 일본에서 바라보니, 조선은행의 영업확장 욕심이 지나치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은행법 개정안은 결국 통과되었다. 아라이의 상사이자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寺?正毅) 총리와 조선은행 총재를 지낸 쇼다(勝田主計) 대장상이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은행을 니시하라 차관(西原借款) 사업에 투입시킬 때 이미 보증발행 한도증액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달랐던 식민지의 화폐제도
후발 산업국가인 독일과 일본, 그리고 조선에서는 보증발행 한도와 발행세율이 통화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중앙은행의 발권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제도를 ‘굴신제한제도(屈伸制限制度, elastic limit system)’라고 하는데, 이는 금본위제도에 관리통화제도(불태환제도)를 접붙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금본위제도가 퇴조하고 관리통화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통화량 조절의 작동원리는 굴신제한제도에서 지급준비제도(reserve requirement system)로 대체되었다. 통화량 조절의 힘이 정부에서 중앙은행으로 이동하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새로운 가치 또는 이념이 등장했다.

한편, 일본이 그토록 강조하던 ‘내선일체’는 화폐문제에 적용되지 않았다. 일본은행권은 조선과 대만에서 정금(正金)과 똑같이 취급되고 유통되었지만, 그 반대방향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영국과 함께 금본위제도를 고수한 인도와 달리, 껍데기만 남은 식민지 조선은 금본위제도의 변방이자 이단이었다.

그런 질곡 속에서 조선은행은 대장성과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살피면서 영업을 확장하고 이익을 늘리는 데만 신경을 썼다. 하지만, 대장성(내각)과 조선총독부(군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조선은행법을 제정할 때부터 감독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기관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충돌했다. 대공황이 그 계기였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5.6.21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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