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22> 대한해협 건너온 일본인 임원-조선은행 임원직은 3D 업종 … 과로와 풍토병으로 숨지기도

구분
화폐·금융
등록일
2015.12.06
조회수
10771
키워드
담당부서
경제교육기획팀(02-759-5321)
첨부파일
  • 등록된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1 입헌정우회 수뇌부를 만나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왼쪽에서 두 번째). 총리로서 다카하시는 입지가 약해서 남들의 의견을 좇았으나 대장상으로서 다카하시는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공황 당시 일본판 뉴딜정책이라 할 수 있는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을 주도하고, 금본위제도를 폐기하여 오늘날 아베노믹스의 원조라고 불린다. 그는 조선은행의 라이벌인 요코하마 정금은행의 총재를 역임하여 조선은행을 무척 싫어했다.[사진 한국은행]

[사진1:입헌정우회 수뇌부를 만나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왼쪽에서 두 번째). 총리로서 다카하시는 입지가 약해서 남들의 의견을 좇았으나 대장상으로서 다카하시는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공황 당시 일본판 뉴딜정책이라 할 수 있는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을 주도하고, 금본위제도를 폐기하여 오늘날 아베노믹스의 원조라고 불린다. 그는 조선은행의 라이벌인 요코하마 정금은행의 총재를 역임하여 조선은행을 무척 싫어했다.[사진 한국은행]]


햄릿의 고민은 작은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의 근친상간에서 출발한다. 새 아버지가 아버지를 독살한 원수라는 사실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며 어머니를 수치스러워 하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독백하며 비루한 연명(延命)을 번민한다.
 

그것은 조선은행의 운명이기도 하다. 조선은행의 고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새 아버지로 맞이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종 황제가 ‘대한중앙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세우려고 했던 최초의 중앙은행은 일본의 저지로 수년간 출범이 늦어지다가 결국은 이토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이토가 세운 것은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구)한국은행’이었다(1909년).
 

이토는 한일강제병합에 소극적이었다. 한국 유생들의 저항이 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뒤 한국통감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합병을 하면 심히 귀찮아진다. 한국은 자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1907년 7월 일본인 구락부 초청 연설).
 

이에 비해 가쓰라 다로(桂太?) 총리는 대한제국을 하루빨리 힘으로 병합하려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중요 이권사업을 자기가 챙기려는 욕심까지 있었다. 제2차 한일협약에서 일본제국정부의 식산사업을 개인 기업에 일임하는 형식을 취하도록 한 직후 총리직을 사임하고 ‘동양협회(1907년)’를 창설했다. 그가 회장으로 취임하고, 한국에서 세운 것이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다.


2 서울 명동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모습(조선은행 본점보다 컸다). 이토 히로부미의 요구로 대한제국의 황실과 한일 민간인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반관반민의 회사로 1909년 출범했으나,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주주를 일본인으로 제한했다.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운영되어 조선인들에게는 원성이 자자했다.

[사진2:서울 명동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모습(조선은행 본점보다 컸다). 이토 히로부미의 요구로 대한제국의 황실과 한일 민간인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반관반민의 회사로 1909년 출범했으나,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주주를 일본인으로 제한했다.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운영되어 조선인들에게는 원성이 자자했다.]


 

군부의 요구에 순응한 조선은행

이토는 척식사업의 경영은 한국인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동척’을 ‘한국권업은행’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아울러 대한제국에 중앙은행을 세우려는 계획도 짰다. 일개 상업은행인 일본 제일은행의 발권 특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마침 제일은행장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이토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그가 현상유지를 요청하자 “그러려면 본점을 대한제국으로 옮기게”라며 단번에 거절했다.
 

1909년 2월 동양척식회사의 총재로 임명된 우사가와 가즈마사(宇佐川一正) 육군 중장이 60명의 사원들에게 육군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칼을 짤그랑거리며 서울로 진출했다. 이 모습에 대한제국 국민이 격분하여 전국적인 배일(排日)운동이 일어났다. 자신이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전개되자 이토는 가쓰라를 원망했으나, 일본에서는 그럴수록 힘으로 눌러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신중론자인 이토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3 오늘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남쪽 모퉁이에 새겨진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사진 한국은행]

[사진3:오늘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남쪽 모퉁이에 새겨진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사진 한국은행]]


 

결국 이토는 강제병합에 동의하고 새까만 후배 가쓰라와도 타협했다. ‘(구)한국은행’을 설립하는 대신 ‘한국권업은행’ 설립은 포기한 것이다(1909년 4월). 두 달 뒤 이토는 한국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천황 자문기구) 의장 직을 맡아 귀국했다. 그러나 자기가 주장하여 한일 합작으로 세운 중앙은행에 관심이 많았다. 이임 인사 차 다시 방한하여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새 건물에 ‘정초(定礎)’라는 휘호를 남겼다(1909년 7월 11일).
 

이것이 이토가 서울에서 치른 마지막 행사였다. (구)한국은행 출범을 며칠 앞둔 1909년 10월 26일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고 숨졌다. 그가 죽은 뒤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구)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출범 초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충실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이를 눈여겨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은 총리가 된 뒤에도 이 은행을 이용했다. 대중(對中) 비밀 차관사업의 집행창구로 동원한 것이다(니시하라(西原) 차관, 3월 8일자 칼럼 참조). 그 대가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개정하여 이 회사가 만주에서 수행하던 척식금융기능을 조선은행에 넘겼다(1917년 5월). 이듬해에는 요코하마정금은행이 관동주와 만철부속지에서 수행하던 국고금 취급기능도 넘겼다.
 

하지만, 군 출신인 데라우치가 물러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와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는 대장성 출신의 총리들인데, 그들은 군부와 가까운 조선은행을 견제했다. 특히 하마구치는 ‘조선은행 폐지법률안’을 추진하거나 조선은행과 견원지간(犬猿之間)인 요코하마정금은행의 스즈키 시마키치(鈴木嶋吉)를 총재로 임명하고, 조선은행의 기구축소와 인원정리를 채근했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은행은 만주국 중앙은행의 자격을 꿈꾸고 열심히 정부를 도왔으나 막상 만주국이 설립되자 그 지역에서 축출되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조선은행이니라”라는 탄식이 터졌다.
 

그 시련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끝났다. 일본의 화폐제도와 금융시스템 안정을 명분으로 일본은행을 놔두고 조선은행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조선은행의 조직과 이익은 다시 확대되었으나 그만큼 군부의 입김도 세졌다.
 

조선은행이 군부에 약했던 것은 물론 전쟁 때문이지만, 이 은행의 조직문화도 크게 작용한다. 조선은행 수뇌부는 대장성, 조선총독부, 일본은행 등 상급기관 출신들이 분할한 가운데 농무성, 상무성, 체신성 출신들도 가세했다. 그러니 구심점이 없어 외풍에 흔들리기 쉬웠다.
 

직원들 대부분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근무했던 일본 제일은행 출신들이 차지했으나 이들 중 임원이 된 경우는 1940년까지 단 두 명뿐이었다. 임원의 절반을 내부승진자로 채운 조선식산은행과는 크게 달랐다. 그래서 “수석 졸업생은 식산은행으로, 차석 졸업생은 조선은행으로 간다”는 소문이 조선의 상업학교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해방 직후 조선식산은행 직원들은 이런 소문을 근거로 식산은행이 중앙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행에 그나마 구심점이 있다면, 바로 ‘쇼다 인맥’이었다. 쇼다 가즈에(勝田主計)는 대장성 차관 출신의 제2대 총재인데, 그가 조선은행에 몸담은 기간은 10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데라우치 내각의 대장상이 되어 니시하라 차관을 총지휘했다. 그것 때문에 조선은행이 자본잠식 상태에 빠지자 국고금으로 조선은행에 특별융자 실시를 결정하고 그 다음날 대장상 직을 사임했다. 조선은행 입장에서는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쇼다 인맥’은 정계·관계·재계·학계를 망라했다. 금융계에서는 사위인 히로세 도요사쿠(??豊作)가 훗날 장인의 도움으로 대장상이 되었고, 넷째 아들 쇼다 다츠오(勝田龍夫)는 조선은행을 거쳐 훗날 일본부동산은행(1977년 ‘일본채권신용은행’으로 변경)의 회장이 되었다. 쇼다 가즈에는 자기 자신과 그들의 친구들을 조선은행 임원으로 앉히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부동산은행은 조선은행의 잔여 재산을 근거로 설립된 기관이라서 조선은행의 기록물들이 많다. 쇼다 다츠오 회장은 그것들을 모아 『조선은행사』(1987년)를 발행했다. 오늘날 조선은행 연구의 교과서가 되고 있는 그 책에는 아버지의 인맥이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쇼다 가즈에 인맥은 30년 간 지속한 조선은행 내 최대 파벌이었고, 외압의 전달창구였다. 그들을 통해 무리한 요구를 접한 직원들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독백하며 비루한 연명을 번민했다.

 

 

대륙진출 위한 일본 엘리트의 도전

대장성 관료이면서도 군부와 가까웠던 쇼다 가즈에는 외압과 파벌 조성을 통해 조선은행을 위기에 빠뜨린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은행이 총재로 맞이했던 사람 중 최고위 인사라서 직원들은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국장급이 오기에도 충분한 자리를 현직 차관이 자원한 데 대해 “내가 변두리까지 오게 된 것은 평소의 포부를 펼치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총재 취임사). 그 포부는 일본의 대륙진출이었고, 다른 임원들도 거기에 호응했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조선은행의 임원 자리를 거친 사람은 34명이다. 패전 직후 일본으로 돌아간 7명을 빼면 27명인데, 이들 중 6명이 재임기간 중 순직했다. 엄청난 사망률이다. 중국 다롄(大連), 서울, 평양 등에서 9~16년을 근무하다가 41~57세의 나이로 죽은 것으로 볼 때 그들의 사망원인은 아마도 풍토병과 과로로 보인다.
 

그들은 대부분 도쿄제대(東京帝大)나 교토제대(京都帝大) 법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이 왜 대한해협을 건너와 ‘변두리’에서 목숨을 재촉했을까? 그것은 후대의 번영을 위해 당대가 객지에서 고생하겠다는 당시 일본인들의 시대적 사명감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제시장’ 세대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네가 가라, 하와이”라는 태도로 서울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도전정신이었다.
 

한편, 1945년 8월 갑자기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인 간부들은 모두 돌아갔다. 그동안 만주, 평양, 청진 등에서 흩어져 근무하던 조선인 하급 직원들은 그들이 떠난 뒤 서울의 본점으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5.12.6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차현진

 

유용한 정보가 되었나요?

내가 본 콘텐츠